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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라틴어 수업

by CoachDaddy 2020. 2. 16.

라틴어 수업 - 한동일

 

수도자와 학자는 궁극의 진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라틴어가 주는 느낌은 왠지 모르게 유럽의 먼지냄새나는 수도원을 연상시킨다. 분명히 사람들이 쓰는 살아있는 언어가 아니라, 죽어있는 언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여전히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는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는 사실도 신기하다. 사람들이 언젠가 한번쯤은 배워보고 싶은 언어라는 생각을 해봤음직하고 나도 그렇다. 여러가지 부분이 학자 혹은 수도자의 잠언처럼 생각된다. 아주 복잡하고 엄밀한 체계를 공부하는 것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의견도 충분히 동의 할 수 있다. 무언가를 공부하고 배워가는 방법이나 자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되는 책이다.

 

pp. 27

사실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꽂을 책장을 만든느 것입니다.

 

pp. 35

우리 마음속에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을 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지랑이'라는 단어가 억겁의 시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쉽게 포기하지 말고 시시때때로 그렇게 우리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pp. 44

<라틴어의 고상함에 대하여> ..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올바른 방법이 모든 표현의 기초가 되고, 그것이 참다운 지적 체계를 형성한다-고 말합니다.

 

pp. 51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

 

pp. 55

언어는 그 자체의 학습이 목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목적이 강합니다. ... 언어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틀입니다.

 

pp. 56

언어 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라는 말에 부합되는 공부의 길이 됩니다.

 

pp. 63

Postquam nave flumen transit,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

  •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 한다

 

pp. 72

좋은 수업도 한 편의 좋은 영화, 심금을 울리는 한 곡의 노래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수업에서 다루는 지식이 학생들의 삶의 어느 부분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어야 하고, 어떤 지식에 대해 학생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확장시킬 여지를 던져줘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 그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활용할 방법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또한 그 지식 외의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도록 해줘야 하죠. 즉 진짜 교육은 학생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 라틴어 학습은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pp. 73

라틴어의 성적 구분 

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 최우등

Magna cum laude 마냐/마그나 쿰 라우데 우수

Cum laude 쿰 라우데  우등

Bene 베네 좋음/잘했음

 

평가 언어가 모두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잘한다/보통이다/못한다' 식의 단정적이고 닫힌 구분이 아니라 '잘한다'라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속에 학생을 놓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겁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스펙트럼 위에서라면 학생들은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발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럽 대학의 평가방식에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pp. 81

지금의 내 모습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각자 살아온 삶이 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문제를 정립하고 해결해왔을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틀이 논리이고 그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내 안의 논리와 만나기 위해 시간을 들여 성찰해야 하며 그것을 바른 방향으로 정립시켜나가야 합니다.

 

pp. 83

그런데 겸손한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실패의 경험에 대해 지나치게 좌절하고 비관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실패한 나'가 '나'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건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자만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한 번의 실패는 나의 수많은 부분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쉽게 좌절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겁니다. 우리는 실패했을 때 또 다른 '나'의 여집합들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 여집합들이 잘해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하죠. 이렇게 자신이 가진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나아가는 것이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요?

 

pp. 102

키케로가 <법률론>에서 말하는 이성에 대한 정의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탁월합니다. 키케로는 인간이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귀중하게 생각했는데요, 그가 한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 따라서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법에서 출발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올바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정의한다면 법은 자연에서 받아들여진 최고의 이성이며, 그것이 무엇을 행하거나 반대로 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그와 같은 이성이 인간의 정신 안에서 확증되고 완전할 때 법이 된다.

 

나아가 키케로는 그리스 철학을 넘어 "우리는 최상의 법에서 참다운 법의 원천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이다. 어떠한 성문법이나 모든 도시국가에서 제정한 법보다 먼저 태동하였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이성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성은 인간과 신에게 있는 것이며, 신과 더불어 최초로 인간에게 결합된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과 신 사이에서도 합리적이며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것이 법이 되며, 우리는 법으로 인간이 신과 함께 결합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라고도 했습니다.

 

pp. 130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포스트 코이툼 옴에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

"모든 동물은 성교(결합)후에 우울하다."

갈레노스 클라우디오스가 한 말입니다. ... 그 의미는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어도 개인적, 사회적인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독하고 외롭고 소외된 실존과 마주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 특히 윤리적 인간이 비윤리적인 사회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영적인 동물로서 이성적 인간(homo sapiens)이자 종교적 인간(home religious)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학에서 이 명문을 해석한 내용입니다.

 

pp. 135

종교는 단순히 강력한 절대자에게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냉혹한 체제와 부조리한 가치관으로부터 고통받는 삶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초기기의 인류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신적인 것에서부터 유추하려고 했던 것이죠.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데우스 논 인디제트 노스트리, 세드 노스 인디제무스 데이.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pp. 156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 인간은 그렇게,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죽음으로써 타인에게 기억이라는 것을 물려주는 존재입니다. 이제 거기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봅니다. 부모님이 내게 남긴 향기는 제 안에 여전히 살아 있지만 그 다음을 만들어가는 것은 제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기억을 밑거름 삶아 내 삶의 향기를 만들어낼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시 비스 비탐, 파라 모르템

삶은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pp. 161

호타리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돌라 포스테로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

... 시의 문맥상 '내일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고 오늘에 의미를 두고 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쾌락주의 사조의 주요 표제어가 되었다는 겁니다

 

pp. 177

사실 우리의 아품은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문제일 겁니다. 그런데 기득권을 누리는 사회 일각에선 자꾸 개인의 문제로 돌려 청년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어요. ...라인홀드 니부어 -  '윤리적 인간, 비윤리적 사회'라는 말이 시시때때로 간절히 생각납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한 개인이 윤리적으로 잘 살고 싶어도 살기 힘든 그런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불법을 부추기고 합법엔 인내를 발휘해야 합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무능한 것이고 약삭빠르고 초법적으로 살면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pp. 182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Tomas a Kempis - 토마스 아 켐피스

 

pp. 214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pp. 215~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하는 것이죠. 그래야 책 한 권을 읽어도 가벼이 읽게 되지 않고 음악 한 곡을 들어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겁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만남이 될 겁니다.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pp. 218

Desidero ergo sum.

데지데로 에르고 숨.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위와 같이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욕망에 대해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단정하기에 앞서 욕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이제까지 사람들은욕망에 대해 비난하기만 했지 정작 누구도 인간의 정서와 욕망에 대해 제대로 규명한 적은 없었다는 겁니다. -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pp. 220

스피노자는 "예속적인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그저 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 압도되어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속적일수록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잃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킬 적합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욕망은 그저 맹목적인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능력이나 활동을 확대시키지 못한 채로 무수한 단절과과 실패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pp. 243

Verumtamen oportet me hodie et cras et sequenti die ambulare.

베르타멘 오포르테트 메 호디에 에트 크라스 에트 세쿠엔티 디에 암불라레.

사실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잘 가고 있습니까?

그 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 길 위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pp. 266

Dilige et fac quod vis.

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pp. 267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두 가지를 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pp. 272

Nolite ergo esse soliciti in crastinum cratinus enim dies solicitus erit sibi ipse sufficit diei malitia sua.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pp. 274

Hoc quoque transibit!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이 또한 지나가리라!

 

pp. 275

... "부처님 말씀에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없고 잠시 머물 뿐"이라 했습니다. 불가에서 완전이란 없어요. 진정한 완전이란 완전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웃고 울 일들이 일어나고 또 지나가고 그렇게 반복해가는 것일 겁니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새로운 창조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각해볼 만합니다.

 

pp. 280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Dum spiro, spero.

둠 스피로, 스페로.

숨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

 

Dum vivimus, speramus.

둠 비비무스, 스페라무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희망한다.

 

pp. 282

Letum non omnia finit.

레툼 논 옴니아 피니트.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pp. 284

내가 책의 저자라면, 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죽음을 기록하고 또 논평할 것이다. 죽음을 가르치는 사람은 동시에 삶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수상록> 미셀 드 몽테뉴, <<철학을 연구하는 건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