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by 한병철
저자는 서사와 이야기를 구분하려고 한다. 아마도 독일어 원문에서 서사와 이야기를 구분했을 것이다. 이야기는 Storytelling - Storyselling 으로 이어진다면, 서사는 경험-조언-추상화 같은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요즘 사회 - 후기 근대 - 사회에서는 정보의 습득-이해-추상화-변형 이런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추종하기보다는 단순한 정보 전달과 관련된 관심의 획득을 위한 것에 집중한다고 설명한다. 쟝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겹쳐 읽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서사(narrative, Erzählung), 이야기(Story, Geschichte)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출신 철학자인 저자의 이력이 특이해 보였다.
- 발터 벤야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 발터 벤야민 : 1892-1940 by 한나 아렌트, 이성민 ( link )
pp. 23
현실이 곧 정보와 데이터의 형식으로 변환된다. 현실이 정보화되고 데이터화된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정보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정보를 통해 인식한다. 정보는 표상, 즉 재현존화한 것이다. 현실의 정보화는 직접적인 현존 경험(Reasenz-Erfahrung)을 약화시킨다.
pp. 29
벤야민에 따르며, 이야기하는 사람은 '청자에게 조언을 주는' 사람이다. 조언은 문제에 대한 단순한 해결책만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조언은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면 좋을지에 대한 제안이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뿐 아니라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하나의 이야기 공동체에 속한 셈이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조언은 이야기의 맥락이 되는 그 사람의 일상에서 탐색되고 얻어진다. 조언은 지혜로서 '삶의 구조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이야기로서의 삶에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살밍 더 이상 이야기될 수 없게 되면 그 안의 지혜도 소멸된다. 그리고 지혜가 사라진 자리는 문제 해결의 기술이 대체한다. 지혜는 이야기되는 진리다. '이야기하기 예술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진리의 서사적 측면인 지혜가 사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pp. 37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탈진한 후기 근대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강조된 '초심자의 기분'이 낯설다. 후기 근대인은 어떤 것도 '신봉'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히 편히 쉴 곳만 찾는다. 어떠한 서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편리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된다. 후기 근대에는 어떠한 갈망도, 비전도, 먼 것도 빠져 있다. 따라서 후기 근대는 아우라가 없는 상태, 즉 미래가 없는 상태다.
pp. 38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현시점에서 다음 현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생존을 위해 마비된다.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pp. 48
삶의 사건들은 단순한 정보로만 취급된다.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긴 이야기도 직조되지 않는다. 이들은 서서적 맥락 없이 그저 접속사로 연결된 채 나열된다. 사건의 서사적 합이 일어나지 않는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성찰적 서사'와 살아온 이야기의 응축은 전혀 가능하지 않으며 요구되지도 않는다. 디지털 플랫폼의 기술적 장치마저도 시간 집약적이고 서사적인 실천(Praxis)은 허용하지 않는다.
pp. 64
서사의 경계는 우리의 실제 삶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무조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또는 무조건 '최적화'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삶은 생존, 즉 살아남기의 삶이다. 건강과 최적화를 향한 히스테리는 벌거벗고 의미가 제거된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최적화는 기능 아니면 효율에만 해당되는 프로세스다. 이야기는 내재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최적화가 불가능하다.
pp. 101
- The End of Theory: The Data Deluge Makes the Scientific Method Obsolete
- https://www.wired.com/2008/06/pb-theory/
pp. 102
이야기로서의 이론은 사물들을 관계성 안에 집어넣은 후에도 왜 그렇게 관계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질서가 있다. 이론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을 발전시킨다. 빅데이터와 반대로 이러한 질서는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고차원적인 형식, 즉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사물을 개념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종결 형식이다. 반면 빅데이터는 완전히 열려 있다. 종결 형식을 띤 이론은 사물을 개념적 틀에 담은 후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적 개념과의 작별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개념 없이도 작동한다. 지능은 정신이 아니다. 사물의 새로운 질서, 새로운 이야기는 정신만이 할 수 있다. 지능은 계산하고 센다. 정신은 이야기한다. 데이터 기반 정신과학은 정을 탐구하는 과학이 아니라 데잍터과학이다. 데이터는 정신을 몰아낸다.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영점에 해당한다. 데이터와 정보로 가득한 세상은 이야기할 능력을 위축시킨다. 그 결과로 이론은 잘 구축되지 않으며 매우 모험적이기까지 하다.
pp. 130
공동의 행위, 그것은 우리의 서사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서사가 상없에 의해 본격적으로 독점되고 있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 공동체가 아닌, 소비사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서사는 마치 상품처럼 생산되고 소비된다. 소비자들은 공동체, 즉 우리를 형성하지 않는다. 서사의 상업화는 이들에게서 정치적 힘을 빼앗는다. .. . 서사적으로 중개된 도덕적 소비는 그저 가지 가치만을 높일 뿐이다. 서사를 토해 우리는 서사를 발전시키는 공동체가 아닌, 자기 자신의 자아와 연결된다.
pp. 134
스토리를 판다는 것은 결국 감정을 판다는 말과 같다. 감정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신체의 본능 층위에서 행동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에 그 시스템을 두고 있다.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으로써 인지적 방어 반응조차 피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전유함으로써 전 반성적 층위의 삶을 점령해 버린다. 그럼으로써 의식적 통제와 비판적 성찰을 피해간다.
'Book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Digital Zettelkasten (0) | 2024.06.27 |
---|---|
수학 예찬 (0) | 2024.06.27 |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0) | 2024.06.11 |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읽기 (0) | 2024.06.11 |
숫자를 사용한 조작의 역사 (0) | 2024.04.21 |